양맥 전투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양맥 전투 梁貊戰鬪 | ||
1차 전투 시기 | 244년 8월 | |
2차 전투 시기 | 259년 12월 | |
장소 | ||
원인 | ||
교전국 | 고구려 | 위 |
1차 전투 지휘관 | ||
2차 전투 지휘관 | ||
1차 전투 병력 | 20,000 명 | 10,000 명 |
2차 전투 병력 | 5,000 명 | 병력 규모 불명 |
1차 전투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3,000여 명 사상 |
2차 전투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8,000여 명 전사 |
결과 | 고구려군 승리 | |
1차 전투 영향 | ||
2차 전투 영향 | 13년전 비류수 전투 설욕. | |
1. 개요 [편집]
2. 1차 양맥 전투 [편집]
3. 2차 양맥 전투 [편집]
12년(서기 259) 겨울 12월, 위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이름(楷)이 장릉(長陵)[2]의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十二年 冬十二月 魏將尉遲楷【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중천왕
동천왕이 비류수 전투에서 대패하고 수도가 불타버린 굴욕을 겪은 지 약 13년 후, 위나라의 울지해가 다시금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강역에 쳐들어왔다. 이에 중천왕이 친히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양맥에서 맞붙어 적군 8천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뒀다. 10년 전 아버지가 당했던 치욕적인 패배를 단단히 복수한 셈.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동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 기병을 『삼국사기』는 철기(鐵騎)라고 명기했지만, 중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의 기병은 정예기병(精騎)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짐작건데 중천왕은 동천왕 때의 참패를 복기하고 위나라가 방진으로 나올 때의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는가 추정할 수 있겠다. 즉, 방진이 고구려의 중장 철기병을 막는데는 효율적이지만,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해 먼저 경기병이 위나라의 방진을 측면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혼란에 빠뜨린 다음 중장 철기병이 정면으로 돌격해서 방진을 격파하고 궤멸시키는 전술을 쓴 듯하다. 이런 복합 기병들이라 경기병이나 철기병이 아닌 정예기병이라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동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 기병을 『삼국사기』는 철기(鐵騎)라고 명기했지만, 중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의 기병은 정예기병(精騎)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짐작건데 중천왕은 동천왕 때의 참패를 복기하고 위나라가 방진으로 나올 때의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는가 추정할 수 있겠다. 즉, 방진이 고구려의 중장 철기병을 막는데는 효율적이지만,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해 먼저 경기병이 위나라의 방진을 측면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혼란에 빠뜨린 다음 중장 철기병이 정면으로 돌격해서 방진을 격파하고 궤멸시키는 전술을 쓴 듯하다. 이런 복합 기병들이라 경기병이나 철기병이 아닌 정예기병이라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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